120억 명 이상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 생산이 가능한데도 세계의 절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뭘까. 2005년 현재 하루에 10만여 명, 5초에 한 아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35%, 동남아시아 전체 인구의 18%, 남아메리카 전체 인구의 14%가 만성 영양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담겨 있다.
장 지글러는 기아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석한다. 자연재해와 같은 돌발 사태 때문에 발생하는 ‘경제적 기아’, 장기간에 걸쳐 식량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생기는 ‘구조적 기아’. 경제적 기아는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지만 구조적 기아는 인간의 악하고 치우친 힘 때문에 일어난 재앙과도 같다. 이 구조적 기아가 세계의 절반을 굶주리게 하는 근원이다.
기아의 원인은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다. 장 지글러는 이를 전쟁, 환경 파괴, 도시화, 시장 왜곡, 식민시대의 후유증 등으로 나누어 보여 준다(아들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의 글이므로 ‘말해 준다’고 해야 맞겠다). 그런데 그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 모든 장을 정확히 관통하는 하나의 테제를 이상하리만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치유되지 않는 식민지 정책의 상흔’이라는 장이 있긴 하지만 다른 장과 준별한 것은 아니다). 아래는 이 책의 목차이다.
1. 일상풍경이 된 굶주림
2. 8억 5,000만의 굶주리는 사람들
3. 기아는 자연도태?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운명?
4. 문제가 집중되는 나라, 소말리아
5. 생명을 선별하다
6. 긴급구호로 문제해결?
7. 부자들의 쓰레기는 가난한 사람들의 먹을거리
8.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무덤
9. 자금부족으로 고민하는 국제기구
10. 소는 배를 채우고, 사람은 굶는다?
11. 시장가격의 이면
12. 세계에서 식량을 가장 쓸모없게 만드는 남자
13. 기아에 관해 가르치지 않는 학교
14. 설상가상의 전쟁
15. 무기로 변한 기아
16. 기아를 악용하는 국제기업
17. 국가 테러의 도구가 된 기아
18. 사막화로 인한 환경난민
19. 삼림 파괴
20. 사막화 대처에 430억 달러?
21. 르 라이으를 찾아서
22. 계속 늘어나는 도시 인구
23. 치유되지 않는 식민지 정책의 상흔
24. 토마스 상카라와의 만남
25. 메말라가는 대지, 사헬
26. 용기 있는 개혁자, 상카라
27. 상카라의 최후
각 목차 앞에 ‘제국주의 때문에’라는 말을 넣어도 대체로 문맥이 틀어지지 않는다. 그럴 뿐만 아니라 실제 오늘날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이유가 제국주의라는 역사적 사실에 에누리없이 들어맞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 유독 기아의 희생자가 많은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우리는 흔히 제국주의 역사의 ‘잔재’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제국주의는 현재이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스위스의 다국적 기업 네슬레와 분유를 두고 싸우는 중에 미국과 결탁한 반동 군부에 의해 무너진 것도, 부르키나파소의 토마 상카라가 체 게바라만큼도 못 살고 운명을 달리 하게 된 것도, 카길 등 4대 메이저 곡물회사가 시카고 곡물거래소를 통해 세계의 식량가격을 왜곡하는 것도, 현물 가치라곤 1도 없는 금융자본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도 제국주의이거나, 가면을 쓴 제국주의이거나, 변형된 제국주의이다.
브레히트는 ‘분노하는 것은 고통이다’라고 했다. 제네바의 은행가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라는 것이다.
세계의 절반을 굶주리게 하는 두 개의 큰 축 가운데 하나가 제국주의라면 다른 한 축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다. 어떤 면에서는 레닌이 말한 것처럼 신자유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인 제국주의에 수렴하는 개념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은 매우 독자적이고도 독창적으로 시대를 지배하고 있으므로 달리 보는 게 옳지 싶다. 이 책에서도 그 중요성 때문에 특별히 주경복 교수의 기고문 <신자유주의를 말한다>를 부록으로 실은 듯하다.
신자유주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자유’라는 말이 주는 긍정의 뉘앙스 탓에 오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천부적 인권 개념으로서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애덤 스미스를 시원으로 하는 경제 자유이고 구체적으로는 자본적 자유이다. 또한 이를 향유하는 계층 혹은 집단도 가진 자들, 즉 자본의 소유자들이다. 책에 소개된 신자유주의의 의미를 다소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유'의 전제가 잘못되어 현실을 왜곡하는 것, 간섭을 최소화 하고 자유를 최대화 한다고 하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출발선이 다른 점을 무시하는 것, 자본가들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어 다수의 약자들이 소외되는 것, 자본의 탐욕이 끝없이 확대되어 불필요한 영역들까지 시장에 편입함으로써 물질만능주의를 부추기는 것, 문화, 교육, 예술 등 고유한 가치를 지니는 영역마저 시장논리로 접근하여 삶의 체계를 건조하게 만들고 끝내는 인류문화를 황폐화시키는 것, 이것이 신자유주의다.
한 가지만 더 적어두자면, 신자유주의는 19세기 말 제국주의 광풍과 20세기 초 나치 독일의 제노사이드를 부추긴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꽃을 꺾을 수는 있어도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다.
You can cut all the flowers
but you cannot keep spring from coming.
칠레의 시인이자 정치인이었던 파블로 네루다의 말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마지막 구절이기도 하다(책에는 “그들은 모든 꽃들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산문으로 씌어 있으나 시적 운율을 감안하면 위의 번역이 적절해 보인다). 저자는 네루다 인용 앞에 다음과 같이 적어 두었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봄은 언제 오는가?
네루다의 말이 은유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장 지글러가 간절한 바람으로 책을 마무리한 이유도 누구나 안다. 현실은 그토록 춥고 절망적이다. 그렇다고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선 안 된다. 희망이라는 게 맞을수록 내성이 생기는 진통제 같은 거라도.
그런데 마음 속 깊은 데 스민 이런 회의는 도무지 지워버릴 수가 없다.
정말 봄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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