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때가 다 되어도 나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벌써 사흘째 아무 일도 못 했다. 어제 저녁 집에 들어서며 보았던 아이들의 눈빛이 하루종일 어른거린다. 그 속에 세상의 모든 절망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두 아이는 내 눈에서 천천히 시선을 옮겨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내 빈 손을 하나씩 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아내는 무심한 얼굴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식탁에 둘러앉았다. 밀기울로 곡기 흉내만 낸 수프와 감자 몇 알이 전부인 저녁식사도 오늘 일을 하지 못하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잔인한 오후가 저문다. 이제 누군가 불러 가 일을 시켜 준다고 해도 가족들 먹여 살리기에는 턱도 없는 품삯을 받겠지만 그래도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더 걱정인 건 내일도 오늘 같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모레는, 글피는..... 아이들의 몸도, 아내의 마음도 야위어 가다 어느 날엔가 마른 잎처럼 질 게 분명하다. 세상은 애초부터 이렇게 생겨먹은 건가.
누군가 일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뛰어갔다.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이 그를 따라 포도밭으로 갔다. 먼저 와 일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보다는 적게 받겠지만 그나마 감자 몇 알은 살 수 있을 테지. 땀을 뻘뻘 흘리도록 거름을 나르고 풀을 뽑았다.
어두워질 무렵 포도밭 임자가 일꾼들을 모았다. 마지막으로 온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런데 세 시에 온 일꾼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열두 시에 온 일꾼들도 그랬다. 마지막으로 맨 먼저 온 일꾼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여기 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먼저 온 일꾼들이 투덜거렸다.
“맨 나중에 온 저 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포도밭 임자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내 귀에는 점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 생각에 푹 빠졌다. 양고기를 조금이라도 사야겠다. 호밀빵도 두 덩어리 사야지. 물을 아주 듬뿍 넣고 끓인 양고기 수프에 호밀빵을 먹이면 아이들도 내일 점심까지는 든든할 거야. 또 일을 못 하게 될 날에 요긴하게 쓰려면 나머지는 아껴둬야겠지.
머리카락을 헝클고 지나가는 저녁 바람이 하느님의 손길인 것만 같았다. 내 두 손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떠올라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Unto This Last>는 경제학에 관한 존 러스킨의 논문이다. 1860년 9월에서 12월까지 월간 잡지 <콘힐 Cornhill>에 네 편으로 나위어 처음 연재됐는데, 러스킨에 따르면 ‘맹렬한 비난’과 함께 이후 넉 달이 넘도록 출판사에 발간 금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862년 네 편의 논문을 한 권으로 묶어 책을 냈다. 책의 제목은 신약의 마태복음 20장에서 빌려왔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누구라도 마태복음 20장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읽고 가장 먼저 떠올리는 말은 ‘불공평’이 아닐까.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끝 무렵 온 사람이 같은 품삯을 받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형평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식’이라는 것에 있다고 러스킨은 진단한다.
이른 아침에 인력시장에 나온 일꾼들이나 열두 시, 세 시, 그리고 다섯 시까지 누군가 부르러 오기를 기다린 일꾼들이나 일 해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는 똑같다. 그들 모두 오늘의 품삯 한 데나리온을 벌지 못하면 당장 온 가족이 굶어야 한다. 그렇다면 포도밭 주인은, 나아가 세상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독교에서는 품삯을 구원으로 본다. 먼저든 나중이든 믿음만 있다면 구원에는 선후가 없다는 얘기다. 한편의 우화 같은 저 포도밭 주인 이야기에서 러스킨도 같은 지점을 바라본다. 경제의 핵심은 시간적 선후, 물리적 다소를 따져 급부를 형평에 맞게 ‘차별 제공’하는 기준을 만드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상식’으로는 저 포도밭 일꾼들이 같은 삯을 받는 걸 이해하기 힘들다. 왜 그럴까? 러스킨의 통찰은 간단하다. 우리의 상식이 기존의 경제학, 즉 애정도 영혼도 없는 비인간적 경제학에 갇혀 있어서이다.
나는 단지 뼈 없는 인간을 가정한 체조학에 관심이 없듯이, 영혼 없는 인간을 가정한 경제학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 현대 경제학도 이 체조학과 비슷한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학’이라는 찬사가 따라붙는다. ‘생명의 경제학’, 심지어 ‘천국의 경제학’이라는 달달한 여구가 달리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러스킨은 애덤 스미스, 리카도 등 기존의 ‘정통’ 경제학은 물론 카를 마르크스와도 다른 차원에서 경제를 짚는다(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보다 7년 늦게 나왔으니 이치에 맞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경제학 텍스트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낱말들-영혼, 애정, 도덕, 고결, 정직 등-이 예사롭게 등장한다.
집안에 빵 한 조각밖에 없는데, 어머니와 자식들이 모두 허기져 있다면, 이들 사이의 이해관계는 같지 않다. 어머니가 빵을 먹고 있으면 아이들은 달라고 보채겠지만, 자녀들이 빵을 먹고 있으면 어머니는 허기진 채 일터로 나서야 한다. 그러데 어머니와 자녀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반드시 ‘적대적’이라고 해야 하는가.
존 러스킨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르네상스 시대가 요구하던 전인(全人)의 인간상에 걸맞는 사람이었다. 1819년에 태어나 1900년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예술평론가, 화가, 저술가, 사회운동가이자 독지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였고 문학에서 지질학, 건축학 등을 아우르는 수많은 책을 쓰기도 했다. 그 가운데 이 책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레프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 버나드 쇼, 알랭 드 보통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특히 간디는 자서전에서 이 책을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꾼 책’이라 했고 나중에 그가 세운 아쉬람의 운영이념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고용주가 고용인들을 정당하게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식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고용인이 되었을 경우 그 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생각해 보고, 지금 고용인들을 그렇게 다루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엄숙히 물어보는 것이다. (...) 공장주는 노동자들에게도 항상 자식 대하듯이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경제학의 이런 논점에 줄 수 있는 유일하게 효과적이며 진정성 있고 실질적인 철칙이다.
러스킨은 ‘정통 경제학’으로부터는 물론 그보다 시기적으로 뒤에 정립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도 좋은 대접을 받지 못 했다. 현실감각 없는 몽상가, 순진한 이상주의자에서 부르주아적 계급부정론자라는 말까지, 그를 향한 비난은 다양했다.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경제의 최고선, 즉 높은 생산성과 그에 따른 이득이라는 건 기실 ‘뼈 없는 인간을 가정한 체조학’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들은 경제적 최고선을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고용인이 된 자기 자식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사람들이거나.
러스킨은 또한 진정한 ‘부의 광맥’은 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생명 없는 광석 따위가 아니라 ‘활기차고 눈이 반짝거리는 행복한 인간들’이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의 제조업 가운데 양질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결국에는 가장 수지맞는 사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인더스강의 사금이나 골콘다의 다이아몬드가 여전히 군마(軍馬)의 장식으로 빳빳하게 달려 있고, 노예의 두건에서 빛나고 있을지 모르지만, (...) 영국은 마침내 (...) 자신의 아들들을 데리고 나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를 감히 상상해 본다.
“이 아이들이 바로 내 보석입니다.”
(로마의 개혁가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에 관한 이야기. 어떤 모임에서 귀부인들이 각자 자기들의 보석을 자랑하고 있을 때, 그녀는 두 아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를 가리키며 '이 아이들이 내 보석입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 옮긴이 주에서 재인용)
러스킨은 언행일치의 삶을 살다 간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아버지는 와인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아들에게 ‘특권 계급’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을 물려 주었다. 그렇지만 러스킨은 ‘워릭 성에 살면서 보고 놀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작은 집에 살면서 워릭 성을 보고 크게 놀라는 것이 아마도 훨씬 더 행복할 것이다’는 말이 함의하는 대로 살았다. 그는 런던 노동자대학교(Working Men’s College in London)에서 강의하는 한편 UCL 슬레이드 미술대 교수를 재직하기도 했다.
물론, 러스킨이 다방면에 굵직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적지 않은 유산 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물려받은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자선사업에 소진했다.
빈자가 식량을 얻지 못하는 것은 부자가 자신의 부를 붙들고 놓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비열하게 쓰기 때문이다. 부는 힘의 한 형태이다. 힘센 자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힘을 해롭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는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보고 '저 강자의 팔을 부러뜨려라'고 외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다 나은 목적에 쓰도록 가르쳐라'고 말한다. 부를 얻는 것은 용기와 지성이다. 인간에게 그것들을 준 신의 의도는 부를 낭비하거나 남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부를 이용해 인류에게 봉사하라는 것이다. 즉 잘못에 빠진 자들을 구해주고 약자를 도와주라는 것이다.
‘나중에 온 사람’을 오늘의 현실에서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파견직 노동자, 비자발적 실업자, 비숙련 노동자 등 우리 모두가 눈 앞의 삶을 어떻게든 견뎌내야 하는 맨 나중에 불려온 사람들이다. 설령 늦게 왔을지라도, 아니 아예 거기 못 왔을지라도 한 데나리온쯤은 받게 해 줘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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