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名
문성록
무당이었을까 중이었을까 아니면 장수(將帥)였을까 밥은 굶지 않았을까 엄동설한에 무명 홑겹 걸쳐 입고 떨지는 않았을까 고래 등 같은 집안 곳곳에 첩을 들여놓고 살진 않았을까
소금 지고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니진 않았을까 가다 해지면 무덤 사이에 몸 누이고 귀신의 얘기 엿듣진 않았을까 귀신이 일러준 대로 아랫마을 배롱나무집을 찾아가 아궁이 앞에 넘어져 얼굴 데인 딸아이가 있느냐 물어보고는 뒷산 참나무 숲 붉은 진흙을 구해다 바르면 낫는다는 말을 전해주고 오진 않았을까
소금 지고 가다 도랑에서 쌀 씻어 솥을 걸어 밥 안치고 소금으로 간해가며 한 끼 때우진 않았을까 해지면 귀신과 벗하며 새우잠 청했다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속 그 소금장수가 어쩌면 아버지가 그렇게도 뒤적이던 족보 속 이름들의 캄캄한 생은 아니었을까
믿을 수 없는 족보를 뒤적이며 까마득한 이름들을 생을 더듬는다 주인집 대들보에 목 매 죽은 딸을 안고 오열하던 까막눈의 노비였을까 이름이나 있었을까 바다에 나가 여태 소식 없는 바닷사람이었을까 전쟁 통에 끌려가 죽어 버려진 들판에 피어난 꽃이었을까 주검이었을까
우리가 역사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들은 왕후장상영웅호걸과 그 연대기만이 아니라 무수한 무명인들의 평장(平葬) 같은 흔적들이기도 하다. 우리 대부분의 할아버지들과 그 할아버지들은 제 목숨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버거워 굴곡진 현실에 아주 납작 엎드려 살 수밖에 없었거나, 훔친 노비문서 품고 아씨 손목 잡은 채 도망나와 세상 밖에서 가까스로 살아내야 했던 존재들이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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