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 비어스의 다이아몬드 광고(1955)(출처-pinterest)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A diamond is forever.’

카피라이터 프랜시스 제러티가 1947에 쓴 이 절묘한 문구는 드 비어스 De Beers가 대공황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캠페인에 사용했고 몇 십 년 후에는 이 네 단어로 된 문장이 역사상 가장 돋보이는 브랜드 슬로건 중 하나로 꼽혔다. 주술과도 같은 이 문장과 더불어 다이아몬드는 하얀 드레스와 함께 결혼을 상징하는 전 지구적 오브제가 되었으며 드 비어스는 한때 전 세계 다이아몬드 유통량의 90%를 장악할 정도의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의 재산 중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물건에서 나온 것이 많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축복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실제로는 저주가 되었다. 그것이 시에라리온에 참혹한 내전을 일으켜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것을 장악하는 사람이 나라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다이아몬드다.”(MBC 다큐멘터리 <시에라리온, 다이아몬드 잔혹사> )

 

(출처 불명)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라는 문장은 이제 피의 결정(結晶)이다라는 술어로 끝나야 하지 않을까. 시에라리온 내전이 낳은 참상은 그것과 함께 인류의 가장 추악한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내전이라고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종횡으로 촘촘히 얽힌 전쟁이었다. 이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전쟁으로 전체 인구 450만 명 중 35만 명이 사망하고 150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특히 전쟁 중 두 손목을 잘린 사람이 7천여 명이나 되는데 그랬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투표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니 인간의 잔학성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피의 다이아몬드(Blood Diamond)’는 영국의 인권단체 글로벌 위트니스(Global Witness)’의 보고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2000년 남아공의 킴벌리에서 전쟁으로 인한 다이아몬드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다이아몬드의 참혹한 진실을 세상에 알린 게 영국의 인권단체라는 것도, 대책회의가 열린 곳이 킴벌리라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보다 130년 앞서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독초의 씨앗을 심은 사람이 영국인 세실 로즈였고 그 텃밭이 남아프리카의 킴벌리였다.

 

세실 로즈(영국, 19세기 / 출처-위키백과)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먼저 영국이 케이프타운과 카이로를 잇는 종단정책을 펼쳤고 이에 질세라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마다가스카르까지 횡단정책을 시전했다. 이때 영국의 전위에 선 사람이 광산업자 세실 로즈(Cecil John Rhodes, 185375~ 1902326)였다. 그는 대영제국의 열렬한 신봉자였는데 훗날 히틀러는 그를 가리켜 앵글로색슨의 이상을 진정으로 이해한 유일한 영국인이라고 칭송해마지 않았다고 하니 악마는 악마를 알아본다(One devil knows another).’는 속담이 근거 없이 생겨난 말은 아니지 싶다.

 

세실 로즈는 열일곱 살에 동생과 함께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현 남아공화국)로 요양차 갔다가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당시 케이프의 킴벌리는 광업 붐이 일었고 거기 발을 들이민 세실 로즈의 사업가로서의 촉이 발동했다. 그는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조금씩 사들이는 한편 광산의 물을 퍼내는 데 필요한 증기기관을 영국에서 들여와 이를 독점적으로 대여해 상당한 이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이익을 다이아몬드 채굴권 매입에 쏟아부었다. 그때 그 유명한 로스차일드 가의 재력을 끌어와 매입한 다이아몬드 관련 회사 가운데 하나가 드 비어스였다. 세실 로즈와 드 비어스가 결코 그럴 수도 없었겠지만- 거기서 그 길로만 갔다면 2020년에 옥스퍼드대학교 오리엘 칼리지 이사회가 세실 로즈의 동상을 철거하라는 권고를 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돈이 생기니 야망이 따라 생긴 건지, 본래 있던 야망을 이루자고 돈을 마련한 건지는 몰라도 세실 로즈는 어느 정도 자본이 축적되자 킴벌리의 광산을 동업자에게 맡기고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하며 당대의 여러 명사들과 교유했다. 그에게 다시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영국 상류층은 대대로 우수한 교육을 받아왔고 예술과 법률에 깊은 교양을 갖추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우월한 기질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류층의 문화와 전통은 잉글랜드를 넘어 전세계의 ‘하층 계급’에 널리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래로부터의 혁명, 즉 폭동이 일어나 상류층 세계는 붕괴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하루 빨리 서둘러 하류 계층을 계몽시켜야 합니다.”

 

위 인용문은 안타깝게도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의 저자 존 러스킨이 UCL 슬레이드 미술대 교수로 취임할 때 했다는 강연의 일부이다. 러스킨이 저 연설을 통해 제국주의를 지지하고자 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지만 적어도 세실 로즈 한 사람에게만은 큰 감동과 함께 대오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사실인 듯하다. 세실 로즈는 그 무렵 써 둔 유언장에 영국이 전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비밀협회를 조직하고, 이 협회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 전체, 팔레스타인, 말레이반도, 남아메리카, 일본, 중국을 식민지화해야 한다고 했고 이를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았다.

 

영국 제국주의 정책의 선봉이었던 세실 로즈(출처-위키백과)

우리가 이 세상을 더 많이 차지할수록 인류에게는 더 좋은 것이다.”

신념이 이념으로 바뀌면 자기제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세실 로즈는 대영제국이라는 징고이즘의 화신이 되어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의 든든한 뒷배는 영국 왕실과 다이아몬드 광산이었다.

그는 27살인 1880년에 케이프 식민지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유럽 열강들의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정책이 노골화 하기 시작한 1884년 케이프 식민지 재무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890, 그의 나이 37세 때 케이프 식민지 총리(총독)에 올랐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모든 자금을 끌어모아 남아프리카회사(BSAC: British South Africa Company)를 설립한 것이었다. 말이 회사지 군대를 보유한 약탈·침략 조직이었고 대영제국의 번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돼 있는 세실 로즈의 첨병이었다.

 

세실 로즈는 케이프 식민지를 베이스 캠프로 삼고 BSAC를 앞세워 남아프리카와 중앙 아프리카 일대를 전방위적으로 침략해 영국 본토의 4.5배에 달하는 토지를 강탈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학살과 고문, 약탈, 강간 등 반인륜 범죄가 자행되었다. 특히 마타벨레 족과의 전쟁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량학살 무기로서 맥심 기관총이 등장했다. 세실 로즈의 군대는 50명의 군인과 맥심 기관총 4정이 전부였지만 마타벨레 족 전사들은 진지 앞 1km 안으로 단 한 명도 진입하지 못한 채 5천여 명이 전사했다(출처-위키백과).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인간사냥이었다. 영국인들은 흑인 전사들은 물론 여자와 아이들까지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마을을 초토화 했다. 세실 로즈는 빼앗은 땅에 자기 이름을 따 로디지아(로즈의 땅)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잠비아, 짐바브웨, 말라위가 그곳이다.

 

그러나 세실 로즈의 몰락은 빠르게 찾아왔다. 1차 보어전쟁으로 영국인들에게 쫓겨나 남아프리카 동북쪽으로 이주한 보어인들은 그곳에 트란스팔 공화국과 오렌지(오라녜) 자유국을 세웠고 영국도 이를 인정했지만 1867년 트란스팔에서 금광이, 오렌지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세실 로즈가 움직였다. 그는 눈 앞에 있는 엄청난 광맥을 빼앗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마타벨레 족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한 심복들을 다시 투입해 트란스팔과 오렌지를 쓰러뜨리려고 했지만 이전의 보어인들이 아니었다. 이른바 제임슨 습격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하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세실 로즈는 총독직을 사임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보어인들의 땅을 강탈하기 위해 마침내 제2차 보어전쟁을 일으켰고 여기에 마하트마 간디도 의무병으로 참전했다). 그렇다고 대영제국 건설을 그만둘 그가 아니었다.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지만 언젠가 케이프에서 카이로까지 아프리카를 종단할 날을 꿈꾸며 철도확장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 19023월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세실 로즈는 죽었는가?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는 끝났는가? 어느 것도 그렇지 않다. 다이아몬드만큼이나 세실 로즈와 제국주의도 영원할 것이다. 드 비어스는 여전히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석권하고 있고, 세실 로즈가 출연해 세운 <로즈 장학재단>은 세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장학금을 매년 가장 뛰어난 지구인들 80여 명을 뽑아 수여한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분쟁은 아직도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에 온 세상을 피로 물들이고 다녔던 열강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거나 그 후유증이다. 그들이 노리는 게 피의 다이아몬드, 피의 콜탄만일까? 카길(Cargill)을 비롯한 4대 곡물 메이저 회사가 전 세계 곡물 교역량의 75%, 저장시설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옥스퍼드 대학교 오리엘 칼리지의 세실 로즈 동상(사진 출처-연합뉴스)

 

2015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는 학내의 세실 로즈 동상을 철거하기 위한 단체(The Rhodes Must Fall)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2020년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이 발생하자 세실 로즈의 동상 앞에 수백 명이 집결해 동상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철거와 보존 찬반론이 팽팽한 가운데, 세실 로즈는 오늘도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이 홍진 같은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